은퇴 후 농장에서 일해보니 알게 된 것들|노인일자리의 평범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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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 시작한 농장 노인일자리. 뜨거운 여름날 텃밭에서 일하며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생겼습니다. |
은퇴 후 노인일자리로 용인시민농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자라는 작물이 있는가 하면 같은 농장 안에서도 말라가는 작물이 있습니다. 누군가 꾸준히 돌본 텃밭에는 애플수박이 탐스럽게 열리고, 바쁜 주인을 기다리는 텃밭에서는 작물이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시들어갑니다.
며칠 농장에서 일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결국 돌보기 나름이구나.
오늘은 제가 노인일자리로 용인시민농장에서 일하며 보낸 평범한 하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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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준히 관리한 텃밭에는 애플수박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습니다. |
아침 9시도 되기 전에 33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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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9시도 되기 전인데 농장 온도는 벌써 33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
이번 주는 계속 폭염경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침에 농장에 도착해 일을 시작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온도는 벌써 33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외부 청소였습니다.
날씨를 보니 조금이라도 덜 더울 때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교육장부터 먼저 청소하기로 했습니다.
원두막은 사방이 훤히 트여 있어 시간이 지나 조금 더 더워져도 바람이라도 불어오지만, 교육장은 천막으로 만들어져 있어 햇볕을 받기 시작하면 안쪽이 금방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교육장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30분도 지나지 않아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보기에는 좋은 교육장, 청소해보니 달랐다
교육장 바닥은 시멘트 블록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기에는 깔끔하지만 직접 빗자루질을 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바닥 표면이 거칠어 먼지나 흙을 쓸어내는 데 힘이 더 들어갑니다.
의자를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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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멘트 블록 바닥 때문에 의자 다리에 테니스공을 끼워 사용하고 있습니다. |
의자 다리에는 바닥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 테니스공을 끼워 놓았는데, 계속 끌고 움직이다 보니 테니스공이 빠져 굴러다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예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바닥에 맞는 의자를 골랐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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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친 바닥에 계속 마찰되면서 의자 다리에 끼운 테니스공에도 결국 구멍이 났습니다. |
거친 블록 바닥이라면 지금처럼 다리가 고정된 의자보다 이동하기 편한 구조의 의자를 고려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직접 사용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청소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니 시설을 만들 때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앞으로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원두막으로 나오니 더운 바람도 반갑다
교육장 청소를 끝내고 밖에 있는 원두막으로 이동했습니다.
바깥 역시 덥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교육장 안에서 땀을 흘리고 나온 뒤라 그런지 원두막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시원한 바람도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더운 바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방이 트여 있으니 천막 안에서 일할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원두막 청소를 끝내고 이번에는 터널형 쉼터의 식탁과 의자를 닦으러 갔습니다.
하늘마가 만들어준 천연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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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마가 터널 위를 덮으며 한여름 농장에 고마운 천연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
터널 위에는 하늘마가 자라고 있습니다.
덩굴이 터널을 타고 올라가 지붕을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잎 사이로는 하늘마 열매가 드문드문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일부러 천막을 치지 않아도 식물이 자라면서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니 참 보기 좋았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에서 일하다 보니 나무 한 그루, 덩굴 잎 몇 장이 만들어주는 그늘이 얼마나 고마운지도 알게 됩니다.
터널 쉼터까지 청소를 모두 끝내고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쯤 됐습니다.
일을 마치고 동료의 텃밭으로
잠시 시간이 생겨 3번 텃밭을 관리하는 동료에게 갔습니다.
처음에는 텃밭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물이 어떻고, 물은 어떻게 줬고,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농작물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살아가는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누구나 살아온 이야기가 있고, 지금 걱정하는 일이 있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장에서 같이 일하지 않았다면 서로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텃밭 한쪽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노인일자리에서 얻는 것이 꼭 일한 만큼 받는 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이런 순간입니다.
여섯 사람이 먹는 점심도 제각각
11시 30분쯤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섯 사람이 점심을 먹는 방법도 제각각입니다.
두 사람은 간식을 싸왔고, 두 사람은 도시락을 준비해 왔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을 후딱 먹고 나니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농장 이야기에서 시작했다가 가족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까지 이어집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거의 다 지나갔습니다.
젊었을 때 직장에서 먹던 점심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바쁘게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한 이야기도 아니고, 일을 잘하기 위한 회의도 아닙니다.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같은 폭염인데 어떤 텃밭은 잘 자라고 어떤 텃밭은 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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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주고 꾸준히 돌본 밭은 폭염 속에서도 작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
농장을 둘러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관리하는 곳의 작물들은 이번 폭염 속에서도 비교적 잘 자라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주인이 가꾼 텃밭의 애플수박도 탐스럽게 열렸고, 관리자가 꾸준히 돌본 밭에는 작물이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자주 돌보기 어려운 텃밭을 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요즘처럼 뜨거운 날씨에 물 주는 시기를 놓치면 작물이 금방 축 늘어지고, 심한 것은 그대로 말라버립니다.
같은 땅이고 같은 햇볕을 받고 있는데도 누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돌보느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집니다.
사진으로 비교해보니 그 차이가 더 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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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농장에서도 제때 돌보지 못한 작물은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
사람이나 식물이나 돌보기 나름이다
오늘 하루 농장에서 일하면서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돌보기 나름이다.
작물은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살펴줘야 잘 자랍니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몸도 돌봐야 하고, 마음도 돌봐야 하고, 나이가 들수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가끔씩 들여다봐야 합니다.
은퇴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은퇴 후 다시 일을 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모르는 것을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농장에서 잡초를 뽑고 청소를 하는 평범한 하루지만 가끔은 그 안에서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합니다.
이번 주처럼 폭염이 계속되는 날에는 밖에서 일하는 것이 겁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침에 나가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점심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잘 자란 작물을 바라보는 것도 지금 제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내일도 더울 것 같습니다.
잘 자라고 있는 작물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저 자신도 잘 돌보면서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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